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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원한 마산인` 한철수 고려철강 회장
작성자 관리자 (ip:)
  • 작성일 2011-08-05 10:3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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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철수 고려철강 회장(59)은 마산에서 태어나 마산에서 초ㆍ중ㆍ고를 나왔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 진학했으나 졸업과 동시에 다시 마산으로 내려왔다. 창원공단 내 조그만 금속회사에서 근무하다 3년 만에 자신의 사업을 구상하며 서른 살 젊은 나이에 철판 유통업체를 설립했다. 30년이 된 지금 연매출 1000억원대 마산 지역 철강유통계의 중견기업으로 키워냈다.

마산상공회의소 회장도 맡고 있는 한 회장은 교사인 아버지 권유에 학창 시절부터 공대 쪽으로 진학하길 희망하면서 늘 공대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 엘리트 코스인 마산중ㆍ고교를 졸업하고 아버지가 원한 고려대 기계공학과에 진학했다.

하지만 막상 공대는 한 회장 적성에 맞지 않았다. 기계 제도 같은 건 아예 흥미를 잃었다. 게다가 1970년대 군사정권으로 시국이 불안했던 시절 운동권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대학 졸업과 동시에 마산에 돌아오면서 취업을 했다. 당시 창원공단 내 `기아기공`에 입사하면서 처음 철강과 인연을 맺었다. 근무한 지 만 3년. 사업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시에는 철강 마진율이 30%가 넘어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3년 동안 번 400만원과 부친과 지인이 도와준 1000만원으로 마산 양덕동의 한 특수강 업체 사무실 한쪽을 빌렸다. 책상 하나 달랑 갖다놓고 더부살이를 하면서 혼자 운영과 영업을 했다. 1인 기업을 설립한 것이다.

한 회장은 "그때는 철강산업이 호시절이었다. 무조건 해도 승산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부산의 한 철강업소에서 물건을 떼어와 마산과 창원 지역에 조금씩 내다 팔았다"고 말했다.

결국 2년 뒤 인근 양덕동에 단독으로 전세를 얻어 더부살이에서 독립했고, 설립 5년 만에 땅을 구입해 제대로 된 회사의 틀을 갖춰갔다. 1991년 마산 봉암공단이 형성되자 이곳에 공장을 지어 이전했고 첫 매출 100억원을 돌파하면서 사업은 안정적인 가도에 들어섰다.

호사다마라 했던가. 고려철강도 1997년 외환위기에 휘청했다. 주 거래처인 당시 기아중공업(현 현대위아)이 법정관리에 들어가면서 타격을 받았다.

한 회장은 "당시 동종 업계 70%가 모두 문을 닫았다. 나도 사업을 접고 다른 사업으로 전환할까 생각했으나 다행히 기아중공업에서 조금씩 자금 등을 해결해주면서 그대로 사업을 존속시킬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고려철강은 이후 점진적으로 성장하면서 지난해 650억원 매출을 달성했다. 또 지난해 고려스틸이란 특수강 유통회사를 별도로 설립해 1년 만에 매출 200억원을 달성했다. 2015년 두 회사 매출 목표는 1200억원.

이런 성장 배경에는 그의 `돌파 경영`이 자리 잡고 있다. 1980년대 사업이 궤도에 올랐을 무렵 농기계회사에 잘못 납품된 철강이 완제품으로 만들어져 결국 리콜이 되면서 거래처로부터 30억원이나 되는 손해배상이 들어와 큰 위기를 겪었다.

한 회장은 "문제가 생기면 사람들은 피하거나 숨을 생각을 한다. 상황을 직시하고 정면으로 돌파했다"며 "거래처 대표와 직접 만나 상황을 진솔하게 설명하자 결국 손해배상은 없던 일로 된 적이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늘 `영원한 마산인`을 꿈꾼다. 함안 등 인근에 저렴한 공단 용지가 있어도 공장을 옮기지 않은 이유다. 최근 마산 지역에 새로 조성된 진북산단으로 회사를 확대 이전한다.

기업인으로서, 마산상의 회장으로서 사회 환원은 물론 지역 현안과 관련한 활동도 왕성하게 해왔다. 마산 1사1교 자매결연, 가곡전수관 법인화, 합포문화동인회와 협약, 마산포럼 창립이 대표적이다.

[창원 = 최승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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